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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간평가단] 침묵에 갇힌 소년 2019-10-23 08:35:36

영화 <더 기버 : 기억 전달자>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로이스 로리의 책입니다. 영화로 한 번, 책으로 한 번, 공평하게 만난 작가의 이번 소설은 1908년에서 1911년까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 속 “전쟁, 차별, 가난, 고통 없이 모두가 행복한 시스템 커뮤니티” 와는 시대와 장르가 완전히 달라서 이 책의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고요. 가난과 차별이 흐르고 넘쳐 열 다섯, 열 여섯난 아들딸들이 남의 집 일꾼이나 식모로 가는 일이 흔합니다. 입 하나 더는 게 큰일이었던, 그런 시절이 미국에도 있었더군요.

8살 캐티의 집에도 엄마의 일을 도와주러 온 수줍고 상냥한 가정부 페기가 있습니다. 아빠의 손수건을 아껴 다림질 하고 가장자리에 금빛이 도는 엄마의 크림색 주전자를 따로 설거지하며 행복해하는 페기가 캐티는 정말이지 좋습니다. 폐기의 언니 넬은 동생보다 먼저 집을 나와 캐티의 옆집 비숍씨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합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꿈꾸는 표정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지만 허영이 심하고 요란스러울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은 캐티의 눈에도 좀 걱정스럽습니다. 넬이 비숍씨의 아들 폴에게 키스를 받으며 동시에 비웃음을 당할 때는 어쩐지 화도 나는데 눈에 보이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폴의 비열함을 무의식 중에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폴과 넬이 더는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른들의 사정을 캐티는 다 알 수가 없으니까요. 페기에게는 제이콥 스톨츠라는 남동생도 있습니다. 이 아이야말로 캐티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영원히 잊지 못할 소년입니다. 제이콥이 자폐아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이콥이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주고 또 아주 잘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이를 표현하지 않을 뿐이라는 걸 캐티는 압니다. 둘은, 캐티 생각일 뿐이지만, 아주 진지한 친구 사이인 게 틀림없습니다. 캐티의 생일날 제이콥이 선물한 고양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어리고 미숙하고 순수하고 똑부러지는 화자 캐티의 눈으로 본 페기와 넬, 제이콥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평화롭고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자가 캐티가 아닌 넬이었다면 이야기의 양상은 상당히 달랐을 겁니다. 빈부와 계급을 나누고 여성이 약자가 되는 사회적 경계 속에 긴장감은 말할 수 없이 거대하고 뾰족했겠지요. 하지만 캐티는 고작해야 8살,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과 사람은 동그랗고 원만합니다. 넬이 떠나고 캐티가 젖은 사료 자루를 보며 울고 제이콥이 치료소에 갇히던 때에 소년이 삼킨 침묵, 침묵 속의 진실이 뭐였는지는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제이콥을 대신해 목소리를 낸 캐티는 로이스 로리 작가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습니다. 이 소설은 낡은 작업복을 입고 푹 눌러쓴 모자 아래 어딘지 억울하고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작가의 상상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 있는 독자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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