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으로 대체된 ‘자라는 것’
‘성장’의 본능을 가로막는 ‘승리’에 대한 본능
세계 역사를 ‘발전’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 동력을 경쟁심, 또는 승부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쟁심이나 승부욕은 인간의 긍정적인 본성으로 장려된다. 다른 한편,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역사를 ‘발전’으로 이끄는 것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승부욕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배움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상반된 관점을 비약하자면, 이기고자 하는 인간 본성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반면, 반대로 배우고자 하는 인간 본성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징코프(Zinkoff)는 이름부터 상징적이다. Z는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다. 이름이 이야기의 결말을 암시한다면 징코프는 항상 꼴등일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성격을 암시한다면, 징코프는 모든 면에서 이기고 또 이기려는 인간의 본성이 없으며, 결코 이기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아이들은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게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이기고 싶어 한다. 너무나 이기고 싶은 나머지 온갖 시합을 다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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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
큰길에서, 뒷마당에서, 골목길에서, 운동장에서. 승리, 승리, 승리의 환호성.
징코프만 빼고.
징코프는 결코 이기지 못한다.
-본문 중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저 자라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자라는 것 자체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하지만 좀 더 자라면 아이들은 ‘자라는 것’을 ‘이기는 것’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기는 것’만이 자라는 것, 즉 성장의 증거처럼 자리 잡는다.『징코프, 넌 루저가 아니야』는 결코 이기지 못하는 징코프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이상적인 결말 대신, 이긴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는다. 성적과 상관없이 학교를 사랑하고, 승패와 상관없이 경기를 즐기며, 가까운 이웃의 비극에 자신의 것을 줘 버리고도 즐거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야말로 ‘행복’이라는 인생의 절대 평가에서 유일한 승리자가 아닌가!
타인의 평가와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에는 너무나 바쁜 징코프. 그는 아무 편견 없이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긴다. 그런 징코프는 주변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며 실속을 차리고, 혼자만의 승리에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양심과도 같다. 그래서 그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특성을 ‘루저’로 이름 붙이고, 모른 척한다. 하지만 이 책을 덮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게 될 것이다. 진짜 이긴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독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길 것인가, 자랄 것인가? 제리 스피넬리는 징코프가 도달하는 결말을 통해 굳세게 선언한다. 승리는 꼭 성장을 보장하지 않지만, 성장은 승리를 동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