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동시집, 텔레비전은 무죄?
‘텔레비전이 판사님 앞에 섰습니다.’
이렇게 느닷없는 말로 동시 한 편이 시작된다. 그러고는 ‘-저 텔레비전 때문이에요, 우리 가족이 벙어리가 된 건.’이라는 원고측의 짧은 고소문. 그러자 누가 심문할 새도 없이 피고인 텔레비전의 호소가 주절주절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이는 만화에 푹 빠져 있고/ 드라마에 취해 집안일도 못 하는 엄마/ 뉴스, 스포츠 보다 말할 시간도 없이/ 곯아떨어지는 아빠’를 다 제 잘못으로 돌리며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한 텔레비전은 스스로 변론에 들어간다.
사실 저도 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꼬박꼬박 휴일에 일요일까지 챙기지만
전 밤늦도록 윙윙대며 떠들어야 합니다.
옛날이 좋았습니다
마당에 멍석 깔고 동네 사람들 다 같이 보던 시절
내가 조금만 웃겨도 손뼉 치며 깔깔대고
조금만 슬퍼도 금방 눈물짓던 그 땐
정겨운 소식도 참 많았는데, 갈수록 더 웃겨야 하고
더 무서워져야 하고 더 끔찍해져야 하고
더 새로워져야 하고……
사람들 입맛에 맞춰 살아가는 제 자신이 저도 싫습니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절 왜 태어나게 했나요?
-「텔레비전은 무죄」 일부, 본문 58~59쪽
결국, 판사님은 ‘텔레비전, 무죄!’라고 외치며, ‘탕, 탕, 탕!’ 망치를 두드린다. 그럼 누가 유죄일까? 아이건 어른이건, 모든 독자들은 이 동시의 끝에서 문득 그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읽어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을 위한 동시집
박혜선 시인의 동시집 『텔레비전은 무죄』(개정판, 푸른책들, 2007)에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평범하지만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생활 속 이야기 동시 57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에서 보듯 박혜선 시인은 매우 독특한 어법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아이다운 발상과 아이다운 어법으로 매우 경쾌하고 발랄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는 어른이 들어도 심상찮게 느껴질 만한 의미들이 숨어 있다.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의 강요와 책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읽어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에게 ‘이 책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읽고, 마음 가는 대로 느끼고, 마음 편하게 덮어도 좋은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뒤에서부터 읽어도 괜찮고,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어도 상관없는 책’, 바로 이 동시집은 ‘읽어라 바이러스’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읽고 싶어 바이러스’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과 일상을 잘 표현한 이 동시집은 또한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고, ‘제15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책의 일부 요소가 요즘 어린이들의 감각에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아이들이 보기 편하도록 판형을 키워 새로이 개정판을 펴내게 되었다. 부디 이 동시집을 보며 아이들이 책읽기의 즐거움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