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판타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
최근 ‘해리 포터’ 시리즈 제5권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열린책들, 2003), 클라이브 바커의 『아바라트』(청미래, 2003)등 여러 권의 외국 판타지 소설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우리 동화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 『뢰제의 나라』(푸른책들, 2003)가 출간되었다.
강숙인 판타지 소설 『뢰제의 나라』는 서구적인 상상력과 세계관 일변도인 기왕의 국내외 판타지 소설과 달리 동양적인 판타지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완성도 높은 판타지 소설들이 폭넓은 연령대의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듯이, 『뢰제의 나라』도 읽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한 13~18세의 청소년을 비롯하여 등학교 어린이와 성인 독자들까지도 흡인력 있게 끌어들이리라 여겨진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담론은 잠잠해진 지 오래이다. 다만 지난 6월 21일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발매된 ‘해리 포터’ 시리즈 제5권 『Harry Potter and the Order of the Phoenix』(Scholastic, 2003)의 원서가 사전 예약에도 불구하고 주문 폭주로 인하여 한국에서도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거나, 밀리언셀러 『개미』의 작가 베르베르의 신작 『나무』가 언론의 대서특필에 힘입어 단숨에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했다거나 하는 식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화제만이 무성할 뿐이다.
국내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대거 배출한 사이버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문학성 유무에 대한 논란이 잠시 일었을 뿐, 기성문단의 냉소적인 시각은 일시적인 담론마저도 급격히 냉각시키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오랫동안 우리 역사와 고전을 재해석하여 동화라는 장르에 담는 데 열중해 온 동화작가 강숙인의 신작 판타지 소설 『뢰제의 나라』는 동화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높은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작가는 우리나라 선도(仙道)의 경전인 옥추보경(玉樞寶鏡)에 대한 폭넓은 탐구를 통하여, 상상 속 천상 세계와 신령스러운 짐승들에 대한 치밀한 묘사, 동양적 이미지와 세계관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 등이 돋보이는 판타지 소설을 창작해 낸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의 대결을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는 영웅을 번번이 내세우는 서구적 판타지의 전형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비중을 두는 전혀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고 있다.
잃어버린 신성(神性)을 되찾는 일
작가 강숙인은 열두 살 소년의 천상세계 모험담인 『뢰제의 나라』를 통해, 현재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 문제, 이를테면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폐혜와 과도한 문명의 이기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신들의 나라인 ‘뢰제의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탓에, 인간이 자신 속에 깃든 신성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 역으로, 인간이 신성(神性)을 저버렸기 때문에 천상세계의 질서마저도 혼란스러워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천상 세계는 결코 따로 분리할 수 없으며,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품 속의 네 마리 신수(神獸)가 야수(野獸)로 전락했듯이, 오늘날의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이기심과 탐욕으로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생의 신비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직관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작가 강숙인은 ‘잃어버린 우리의 신성을 되찾는 일, 그것만이 암담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며 해법’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주요 내용
교통사고로 가사상태에 빠진 소년, 천상 세계의 모험길에 올라…
어느 날 도굴꾼을 추적하다 발각되어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된 12살 소년 ‘다함이’는 도망 중 교통사고를 당해 가사 상태에 빠진다. 저승사자 ‘비두’의 손에 이끌려 강을 건너 저승(천상 세계)인 ‘뢰제의 나라’로 가던 다함이는 비두와 이야기를 하던 끝에 자신이 비두의 실수 때문에 잘못 왔음을 알게 된다. 옆 동네 사는 아이와 죽을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뢰제의 나라로 들어간 다함이는 돌아갈 길을 찾지만, 뢰제의 나라는 뢰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이자 동반자인 ‘푸룬, 붉으나, 하야나, 검운’ -네 대제의 반란으로 뢰제(옥황상제)가 죽고 질서가 어지럽혀진 상태여서 그 뜻을 이룰 수가 없다. 다함이는 이승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심초사하던 중, 뢰제의 계시를 받은 용사 ‘천랑’이 뢰제의 혼을 구하러 떠난 험한 모험길에 동행하게 된다.
뢰제는 네 대제의 반역으로 몸은 죽임을 당하고, 그 몸에 혼이 갇힌 상태로 철저하게 봉인된 천기전에 잠들어 있다. 뢰제의 혼을 구하려면 천기전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지키는 파수꾼인 ‘백호, 현무, 청룡, 주작’을 물리쳐야만 한다. 한때 네 대제를 상징하는 신수(神獸)였던 ‘백호, 현무, 청룡, 주작’은 그 본성을 잃고 비밀통로를 지키는 야수(野獸)로 전락해 있는 상태이다. 천랑과 다함이 일행은 갖은 시련 끝에 백호의 의로움(義)을 일깨우고, 현무의 지혜(智)를 되찾아 주고, 청룡의 인자함(仁)을 깨우고, 주작의 예(禮)를 일깨워 주며 비밀통로를 무사히 통과한다.
결국 천랑은 천기전에 갇혀 있던 뢰제의 혼을 구하고, 자신이 뢰제의 아들임을 증명하며, 다함이를 이승으로 보내 준다. 비로소 이승과 저승의 질서가 바로잡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