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쓴, 독특한 형식의 청소년소설
사람은 그 유한성 때문에 평생 ‘영원불멸’한 그 무엇인가를 꿈꾸며 그리워한다. 그것은 생명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명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다. 이러한 원초적 그리움 중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 흔히 ‘사랑엔 국경도 없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란 말을 종종 한다. 이렇게 국경도, 나이도 보이지 않게 눈을 멀게 하는 건 사랑의 어떤 속성 때문일까? 바로 그리움, ‘휘몰아 너에게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난감한 생명 이동’(신달자, 「그리움」 中)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은 소리 내 불러보았을 때나, 생긴 모양에서 풍기는 다소곳하며 정갈한 이미지가 아니다. 처음 느낌은 그러하나 실은 국경까지 넘을 수 있는 대단히 열정적이며 깊고 절절한 감정이다. 이런 그리움의 정서를 시소설로 그린 박윤규 작가의 『천년별곡』이 출간됐다. 『천년별곡』은 박윤규 작가의 시인으로서의 역량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 역사서를 낸 저자로서의 역량이 적절하게 녹아든 것으로, ‘시소설’이란 생경한 장르에 도전해 청소년소설로서는 최초로 시 형식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야기를 시적 운율에 실어 형상화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시소설’로는 김영현의 『짜라투스트의 사랑』(문학동네, 1996)을 들 수 있는데, 그 형식의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렇듯 불모지인 ‘시소설’의 개척점에 서 있는 『천년별곡』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식의 파괴로 인해 전혀 새로운 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이렇게 시로 쓴 소설이 일반화된 장르이며, ‘뉴베리 상’을 수상할 만큼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을 뿐더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시소설이라는 형식적인 면을 보면, 『천년별곡』도 그 맥락을 같이하지만 실은 미국의 영향이 아닌, 우리 전통문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산별곡』, 『가시리』, 『정읍사』 등에서 보이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애절한 정서와 형식을 재해석하고 승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사랑 이룬 주목나무 공주 이야기
박윤규 작가는 태백산 주목나무를 보고 어느 순간, 젊은 여자의 모습을 스치듯이 보았는데, 번개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지만 마치 ‘안녕, 나는 주목나무 공주예요.’라고 인사라도 하고 간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목나무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천 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완성했다.
『천년별곡』은 절제된 언어로, 혹은 절절하게 울리는 메아리로 주목나무 공주가 품은 사랑과 그리움, 기다림을 그리고 있다. ‘소설시’란 장르의 특이성으로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서도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응집된 아름다운 구절구절과 운율, 여운은 읽는 맛을 더한다. 그리고 ‘아으 동동다리’, ‘아소 님하’, ‘얄리 얄리 얄라셩’ 등 고려가요 후렴구의 차용은 운율뿐 아니라 저 오랜 옛날부터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주목나무의 기다림의 역사를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마치 주목나무 공주가 환생을 거듭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는 제목과 표지,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역사를 품은 주목나무를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 작품은 호위무사인 임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홀로 남게 된 공주가 태백산 장군봉에서 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린다는 약속을 시작으로, 천 년의 시간을 그리움으로, 목마름으로 후에는 미움으로 버티어 온 주목나무 이야기이다. 그러다 주목나무 공주는 깨닫게 된다.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임이 매번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동자꽃 아이로, 섬나라 장수로, 충신으로, 소년병으로 말이다. 가볍고 쉬운 ‘인스턴트 사랑’을 하는 청소년들에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만남의 소중함을 아로새겨 줄 만한 작품이다.
주요 내용
나는 태백산 장군봉에서 나이테가 가장 많은 주목나무. 잠드는 순간까지 내 사랑을 기억하며, 아름답고 슬펐고 영원이며 찰나였던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후궁의 딸인 저는 한 나라의 공주였어요. 하루하루를 갑갑한 궁궐에서 보내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천 년 왕조가 망한다는 소문이 쫘했어요. 어머니와 난 호위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별궁을 빠져 나왔지요.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호위무사로 인해 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었지요. 태백산 깊은 골짜기에서 내 사랑과 보낸 백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적에게 붙잡힌 아바마마를 구하겠다고 하여 난 내 사랑을 보냈어요. 그 때 난 약속했어요. 장군봉의 주목나무처럼 기다리고 기다린다고요. 내 사랑도 약속했죠. 돌아오고 돌아온다고요. 하루도 빠짐없이 내 사랑을 기다리던 나는 어느새 백발노인이 되었어요. 나이가 든 것은 서럽지 않으나 행여 임이 오실까 하여, 난 주목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요. 그랬더니 정말 주목나무가 되었어요. 그 숱한 시간 동안 난 오랑캐를 무찌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겠다던 청년 무사와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 드리러 온 동자꽃 아이, 일편단심을 맹세하던 선비,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 섬나라 장수 등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보내기를 반복했어요. 많은 세월이 흘러, 구백 년에서 천 년 사이쯤이었을 거예요. 그 백 년 동안은 지난 모든 세월보다도 힘들었어요. 기다림에 지쳐 원망이 독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난 분노로 온몸을 망가뜨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 사랑이 소년병의 모습을 하고 날 찾아왔어요. 느낄 수 있었죠. 그 소년병이 내 사랑임을. 그러다 난 깨달았어요. 지난 천 년 동안 거듭 거듭 태어나 사는 동안 내 사랑은 한 번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왔던 거예요. 동자꽃 아이로, 섬나라 장수로, 충신으로, 청년 무사가 되어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