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뚱뚱한 소녀’
평범한 표면적 일상 속에 고여 있는 모멸과 자학의 심연
문명이라는 사회를 뒤덮고 있는 오래된 전통이자 강력한 내면화를 이루는 이미지는 바로 ‘여성의 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라기보다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의 이미지’이다. 모든 미디어가 보여 주는 날씬한 몸매는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기보다 그것을 즐기는 타인들에게 보여지고 아름답다고 인정받았을 때에서야 가능한 자기 과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에바는 레너드 코헨의 노랫말 ‘그녀는 몸매를 그토록 대담하고 자유롭게 드러내고 다녔지, 만약 내가 그것을 멋진 기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면(She was taking her body so brave and so free, if I am to remember, it’s a fine memory.)’을 들으며 근사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뭐 그리 대담한 일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뭇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판정받은 여자는 자신을 구경거리로 대담하게 드러낼 수 있는 법이고, 에바의 무의식은 그런 사회적 조류에 반항적이지만, 그렇다고 거스르지도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에 맞추고자 남몰래 단식을 하지만 배고픔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통증은 다시금 폭식을 불러오고, 결국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만다.
덩어리, 덩어리들. 이 얼마나 징그러운 말인가. 구역질나는 말이다.
누구에게 드러낼 수도 없는 자학과 자기혐오는 평범한 일상 아래 고여 있어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뚱뚱하니까 더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고, 뚱뚱한 몸으로 이미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으니까 눈총을 받을 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내면화는 외로움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으로 이어진다.
“나와 함께 있으면 거북하지 않아? … 내가 너무 뚱뚱하니까.”
동일성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미(美)의 감옥
에바는 조금 더 날씬해 보이고자 밝은색 옷을 피하고, 뚱뚱한 몸매를 되도록 가리기 위해 늘 치마를 입는다. 큰 부피를 가질수록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보호색을 쓰는 동물과 같은 자기보호본능은 타인과 소통하고 무리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결국 외따로 떨어진 섬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왜 뚱뚱한 몸은 멸시되어야 하는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60억의 각기 다른 인격체와 각기 다른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날씬함’이라는 단 하나의 미의 기준만을 요구받는 것일까?
대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패션 잡지 사진에 나오는 그런 여자들처럼 보이는 소녀들만 아름다운 건가? 긴 다리, 날씬한 생기 넘치는, 호리호리한, 아리따운 등과 같은 말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그녀는 옛 거장들의 그림들에 나오는 여인들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통통하고 풍만하고 살이 쪘었다. 에바는 웃었다.
하나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폭력적인 미의 감옥. 끊임없이, 거리낌 없이 그러한 폭력을 재생산하는 미디어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날리며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굿바이’할 수 있는 소설이 우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