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오랜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살아남은 책
-신형건 첫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 30주년 기념 특별판 출간!
30년. 갓난아기가 장성하여 어엿한 부모가 될 만한 시간이다. 한 권의 책에게 30년이란 어떤 세월일까. 긴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살아남아 30주년을 맞이하는 책은 흔치 않다. 1990년에 초판이 나온 신형건 첫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가 3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판으로 거듭 출간되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아이들과/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어른들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나온 이 시집은 30년 동안 꾸준히 쇄를 거듭하여 10만 이상의 독자를 확보한 스테디셀러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즈음 이 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은 그 또래의 아이를 가진 부모 세대가 되었고, 청년 독자들은 이제 지긋한 오륙십 대가 되었다.
동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원래 어린이 독자를 염두에 두고 창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거인들이 사는 나라』 초판본(진선출판사, 1990)은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일반 시집의 형태로 출간되었고, 출간 즉시 반향을 일으켜 단기간에 1만 이상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이 시집은 입소문으로 아이들에게도 서서히 전파되어 읽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표제작을 비롯한 3편의 시가 수록되면서 더욱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 후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한 동시집(푸른책들, 2000)으로 재출간되었으며, 개정과 중쇄를 거듭하며 10만 부 이상 판매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번에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판(끝없는이야기, 2020)이 출간되었는데,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어른’ 독자들에게 주는 시집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렇게, 때때로 오래된 것은 다시 새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오는 것이다.
어른 속에 잠자고 있는 순수한 동심을 일깨우는 시
신형건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를 펼치면 우리가 오래 잊고 있었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생텍쥐페리나 쉘 실버스타인 혹은 미하엘 엔데의 글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데, 마음이 맑고 투명해지며 생기와 사랑으로 가득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책 뒤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 “그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같은 동심을 가진 시인이다.”(139~140쪽)라고 이준관 시인이 평한 것처럼, 신형건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를 읽으면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순수한 동심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이 동심은 지금 아이들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처음에 갖고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마음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얀 페인트로 담벼락을 새로 칠했어./ 큼직하게 써 놓은 ‘석이는 바보’를 지우고/ ‘오줌싸개승호’위에도 쓱쓱 문지르고/ 지저분한 낙서들을 신나게, 신나게 지우다가/ 멈칫 멈추고 말았어./ 담벼락 한 귀퉁이, 그 많은 낙서들 틈에/ 이런 낙서가 끼여 있었거든.// -영이가 웃을 땐 아카시아 향내가 난다/ 난 영이가 참 좋다 하늘 만큼 땅 만큼
-27쪽, 시 「낙서」 전문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따스함’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그 따스한 몸무게 아래엔/ 잠자는 풀벌레 풀벌레 풀벌레……/ 꿈꾸는 풀씨 풀씨 풀씨……/ 제 몸을 갉아먹던 벌레까지도/ 포근히 감싸 주는/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이번엔/ ‘너그러움’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63쪽, 시 「가랑잎의 몸무게」 전문
다 읽고 나면 가만히 미소를 짓게 되거나 절로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 시들은 아주 간결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단순한 서정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이야기를 하나씩 담고 있으며 명징한 사유의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 곁의 자연과 친숙한 사물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때때로 자유분방하고 천진한 상상력으로 일상을 유쾌하게 전복시키거나 환상의 세계로 훌쩍 달아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에겐 바로 자신들이 말하고 싶었던 절절한 사연이요, 시적 감흥이며, 멋대가리 없이 커 버린 어른들에겐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133쪽, 이준관의 ‘작품 해설’ 중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형건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 특별판의 맨 뒤엔 출간 30주년을 기념하는 선후배 작가들의 메시지가 실려 있다(145~159쪽). 그들은 이 시집의 롱런에 축하를 보내며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풀꽃처럼 싱싱하고 풋풋하고 향기로”우며(이준관, 시인) “쫓기듯 사는 어른들도 읽고 꿈꾸게 했다. 어른 속에 잠자고 있는 동심을 일깨워 순수한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다.”고(이정환, 시인) 말한다. 그리고 “어린 화자가 보여 주는 솔직한 마음과 엉뚱한 상상 속에 동심이 동당거린다.” 이것이 바로 “30년 동안 한결로 사랑받는 이유일 터”라고(오주영, 동화작가·평론가) 평한다.
오랜 세월 동안 지금껏 많은 독자들과 함께해 온 이 조그맣고 이쁜 시집이 앞으로도 새로운 독자들을 끝없이 만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