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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간평가단] 『기린이 사는 골목』 열다섯,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배화동 저녁 - candy718 2021-02-24 16:56:59

『 기린이 사는 골목
김현화. 글
푸른책들 』

나의 열다섯살, 행복하지 않았다. 그 땐 하루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나이였다. 강원도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아빠도 엄마도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고,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취업 준비로 바깥 생활이 많아진 언니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전학온 오빠의 뒤늦은 사춘기, 초등 동생의 외로움이 얽히고 얽혔던, 내 나이 열다섯살은 가족들과 서울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보며 지내야 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 때 처음으로 ‘가출’이란 걸 하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둡잖은 어른 흉내를 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많이 울고 많이 몸부림쳤던 그 때의 나에게 어른이 된 나는, “잘 견뎌냈어.”라고 해 주고 싶다.

 

동화작가를 꿈꾸는 선웅이와 한국인 아빠와 태국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은형, 무료 급식소 꽃밥집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기수와 약자를 짓눌러야만 살 수 있는 이호, 이들 모두는 열다섯. 아이도 어른도 아닌, 관계 속에서 치열하게 견뎌내는 방법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기린이 사는 골목』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의 열다섯살을 떠올려보게 한다.

“난 동화 쓰는 사람이 될 거야. 내 말이 잘 익어서 뭔가를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때마다 동화를 쓸 거야. 그 동화 속 주인공은 언제나 은형이 누나로 할 거야. 누나가 내 동화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거야. 빛이 나는 사람이니까, 누나는. 내 동화를 듣는 사람들도 그 환한 빛을 볼 거야. 누나는 그런 사람이야. 나, 현선웅한테.”《달밤의 대화》중에서. 15쪽

은형이는 여전히 앵두나무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에 노랗게 불이 들어왔다. 집집마다 유리창 너머 환한불빛이 흘러나왔다. 은형이네 집만 짙은 어둠에 눌려 있었다.선웅이는 방 불을 내렸다. 혼자만 환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호루라기를 손에 잡은 채 앵두나무 덤불을 지켜보았다. 누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달밤에 함께 거닐 때처럼 소리쳐 말해주고 싶었다.
《배화동 저녁》중에서. 70쪽

선웅이의 하루는, 은형이의 대문 여닫는 소리로 시작되고 마무리가 된다. 은형이와 거리를 두고 걸으며 학교를 하고, 은형이의 뒷모습을 보며 수업을 듣고, 은형이가 아빠가 잠들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방황을 지켜보고, 새벽에 거리를 헤매는 은형이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선웅이가 은형이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선웅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웅이는 고도비만이라는 체형으로 버스를 타지 못하고 학교의 언덕길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호의 놀림을 받지만 그것보다 혼혈아인 은형이를 ‘튀기’로 부르며 괴롭히는 것을 지켜만 볼 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소심함이 더 괴롭다.

선웅이는, 매일 밤 들려오는 은형이 아버지 원중선 아저씨의 술주정 소리와 진따나 아줌마의 매다리는 소리 속에서 은형이의 안부를 걱정한다. 따듯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이란 걸 알지만, 선웅이는 은형이를 걱정하고, 그녀가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이 아플 뿐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살아야 하는 은형이에게 선웅이는, 꿈길의 사바나를 지키는 기린이 되어 목을 길에 늘어뜨린다.

 

은형이는 매일이 힘겹다. 학교 끝나고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도박과 술주정으로 하루를 보내고도 성에 차지 않아 엄마와 은형이를 괴롭혀야만 하는 아빠가 잠들어야만 하는, 그의 존재를 은형이는 이제 끊어내고 싶다. 은형이는 모두가 잠든 밤 조용히 집을 나와 깊고 깊은 사바나를 찾아 거리를 헤매인다. 그 때마다 동행해 주는 선웅이의 안내에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밤산책은 그녀의 가슴에 품은 상처가 아프고 덧나고 있음을 대신해서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선웅이 뿐이다. 선웅이는 그렇게 매일 밤 은형이와의 밤산책을 동행하고, 그녀의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기를 기다린다.

슬픔이란 게 있다면 이런 빛일까. 새빨갛게 물든 밥알들이, 순전히 누군가의 한 끼가 되기 위해 몸빛을 바꾼 그 밥알들의 붉은빛이 슬펐다. 밥은 밥답기 위해서 밥다운 노릇을 하는데, 나는…… 선웅이는 숟가락을 내렸다. 뚜루룩, 붉은 보리밥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복숭아씨를 꿈꾸다》중에서. 123쪽

 

선웅이에게 기수는, 곤란한 상황에 짠!하고 나타나는 히어로 게임 속 전사다. 이호 패거리에게 가방이 내동댕이 쳐졌을 때도, 놀림을 받는 은형이를 위해 짓눌려진 용기를 펴고 있을 때도, 원중선 아저씨가 은형이와 진따나 아줌마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에 제압하는 모습이 선웅이에게는 전사이자 영웅이다.

반면, 무료 급식소 꽃밥집을 운영하는 이복구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는 기수에게도 삶은 그리 따듯하지 않다. 젊은 시절 지뢰로 얼굴을 잃은 할아버지 곁에서 살아가는 기수 또한 감추고 숨기는 삶에 익숙해져간다. 그에게 친구란 이호 패거리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선웅이를 위해 나설 때의 잠깐일 뿐, 그 누구와도 관계의 선으로 들여놓지 않는다.

“네가 개미한테 느꼈던 거, 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거든. 묘했어. 이런 애도 있구나. 그 뒤로 내가 거미줄을 치고 사는 것도 아닌데 네가 자꾸 내 시야에 걸리는 거야.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맞아. 네가 여러 번 날 구해 줬어.”

선웅이는 입을 실룩거렸다. 기분 좋았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던 일에 대해 듣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런 나를 응시하는 존재도 있었구나 싶었다. 선웅이도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때 너네 집 앞에서 가끔 기웃거렸어. 꽃밥이 어떻게 생긴 건가 궁금해서. 정말로 꽃을 넣고 짓는 밥인가 해서.”

“그런데 오늘 보니까 꽃이 없지? 실망했겠다.”

“아니.”바람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쌀쌀하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꽃보다 더 좋은 게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기수가 궁금한 눈으로 걸음을 세웠다. 은형이도 선웅이를 보았다.

“따뜻한 가슴.”

가을바람이 한 차례 더 세 사람의 이마로 날아왔다.

“아까 밥 먹으면서 문득 생각했어. 이 밥이 꽃보다 단 건 할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이 들어 있어서구나.”

《같은 시선》중에서. 156쪽

매화동 골목에는, 한달에 한번 노숙자를 위해 침을 놔주는 한의사, 선웅이 아버지, 무료 급식소 꽃밥집을 운영하는 기수네 할아버지 이복구 할아버지, 길고양이 삼백이를 돌보며 꽃밥집에 일손을 거드는 권오복할머니, 이복구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그린 황인백 아저씨가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살아간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아닌, 내가 가진 것을 내놓는 용기를 가진 이들이 사는 매화동 골목은 날마다 조용하고, 날마다 시끌벅적하며, 날마다 누군가의 사연이 흘러나오는, 아주 분주한 곳이다.

그들 틈에서 자라고 있는 선웅과 은형 그리고 기수는 열다섯이란 나이를 힘들게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이겨내며 살아간다. 스스로가 가진 것이 너무나 비루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스스로 타인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혼자인 시간을 선택한다. 혼자인 것이 익숙한 듯 하지만, 결코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등을 돌릴 때의 용기보다 다시 등을 돌려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이복규 할아버지가 주워다 쌓아 놓은 폐지 더미 아래 낡은 리어카가 보였다. 그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이기수…….”

기수의 어깨 위로 별빛이 무너졌다. 그 애도 열다섯 살이었다. 별빛이 무거운 듯 움츠린 어깨. 그 애에게도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히어로 게임 속의 전사 같던그 아이도 고작 열다섯 살이 맞았다. 손수레에 기대 앉아 꺼욱꺼욱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별과 기수 사이의 공간이 슬픔으로 꽉 차올랐다. [중략]

여기저기서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기수의 어깨가 조용히 흔들렸다. 선웅이는 가만히 기수의 어깨를 잡았다. 기수가 돌아보았다. 늘 차갑기만 했던 그 아이의 눈에 강물이 흘렀다. 절렁절렁 깊은 강물 소리가 났다. 선웅이 눈에서도 강물소리가 났다. 기수가 조용히 선웅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로의 마음에서 흐르는 강물 소리. 문득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강물 소리》중에서. 194~204쪽

『기린이 사는 골목』은, 배화동 골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가진 것을 베풀 줄 아는 사람, 가졌지만 더 갖기 위한 사람, 가진 건 없지만 나눌 줄 아는 사람과 그 나눔을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 타인의 아픔을 진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곁을 지킬 줄 아는 사람, 타인의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 함께라는 말이 가진 참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고도 절절하게 담겨있다.

열다섯살의 우리 아이들과 열다섯 살을 보낸 부모가 함께 읽으며,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함께 그 시간의 고단함을 나눌 수 있는 『기린이 사는 골목』은, 근래에 읽은 청소년소설 중 가장 진실된 우리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열흘 낮밤 걸어도 끄떡없는 낙타의 끈기와 사자나 호랑이를 피해 홀로 나무숲과 빼곡한 수풀 속에서 살아가는 표범의 자유로움을 반반씩 닮은 기린이 되어 은형이의 사바나를 지켰다. 목이 길어서 울지 못한다는 속설이 나돌 만큼 과묵한 기린이지만꼭 울어야 할 때는 황소처럼 울기도 한다는데, 아카시아잎을따 먹기 위해 일곱 개의 목뼈가 죽죽 늘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사바나를 보행하며 지평선 너머의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목이늘어난 건 아닌지. 태생적으로 멀고 먼 세계에 대한 의문과 환상으로 고개를 그처럼 늘린 건 아닌지. 은형이를 지켜보며 어느새 목이 한 자씩 자란 선웅이처럼.

기린은 유약하지만은 않다. 맹수는 아니지만 강력한 뒷발차기로 천적이 거의 없는 초원의 강자이기도 하다. 꿈길의 사바나를 굳건히 지키며 은형이와 거니는 시간은 행복했다. 어쩌면 은형이보다 선웅이가 그 꿈길에서 더 깨어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장렬한 태양이 두더지 굴속의 뒷간까지 비추고야마는 그 환한 사바나야말로 상처 입은 누군가를 지키기에 가장안전한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눈꽃 불꽃》중에서. 216쪽

어둠과 외로움 속에 갇힌 은형이를 위해 사바나의 기린이 자처한 선웅이의 순수하고도 맑은 마음이 담긴 『기린이 사는 골목』은, 나의 가슴에 남겨진 열다섯 살의 상처가 위안을 받는 듯하다. 그 때 내 곁을 지켜준 친구 하나가 있었다면 나의 열다섯은 불행하기만 했던 시간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면서, 은형이에게 열다섯은 또다른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래본다.

열다섯 살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꼭 견뎌내라고 전하고 싶다. 분명 곁에서 지켜봐주는 선웅이가 있고, 기수가 있을 거라고. 다만 그들은 스스로 은따를 자처했기에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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