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 바로 그 시인, 신형건의 <넌 바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1권씩 꼭 갖고 있다는 바로 그 그림책, 첫 출간 후 10년 이상 교보문고·예스24 등 주요서점 <유아/어린이> 분야 누적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전설적인 그림책이다.
지난 40년간 시를 써 왔는데, 시보다는 이 그림책으로 유명해진 시인이 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출간 후 20년 동안 시인보다는 그림책 번역가로 훨씬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시인보다 더 유명세를 탄 것은 사실 그림책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이다. 미국에서 원서는 그저 평범한 책이었는데 이 시인의 번역으로 날개를 달고, 유독 한국에서만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에 혼신의 힘을 쏟은 번역가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한국어로 다시 쓰인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속엔 바로 이 시인의 목소리가, 시인 고유의 무언가가 숨어 있을 것이다.
미처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추운 겨울날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치다가
문득, 너랑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먼저
네 입에서 피어나던
하얀 입김!
그래, 네 가슴은 따듯하구나.
참 따듯하구나.
-신형건 시 <입김>
이야기 #2: 세대와 세대를 잇는 이야기가 된 시
“이 시를 누가 썼어요?”
30년 전,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를 보고 선생님께 물었다.
“신형건 시인의 시란다!”
아이는 가슴속 한 갈피에 <벙어리장갑>이라는 시를 고이 간직한 채, 자라고 또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30년 뒤, 이제 엄마가 된 그 아이에게 초등학교 1학년 딸이 <국어> 교과서를 들고 와 말했다.
“엄마, 이 시 좀 읽어 보세요. 별처럼 마음이 <반짝반짝>해져요.”
“아, 신형건 시인의 시로구나!”
이렇게 한 시인의 시는 엄마와 딸이 함께 읽으며 세대와 세대를 잇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신형건 시인의 시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10편이 연달아 실리며 <벙어리장갑>-<그림자>-<거인들이 사는 나라>-<시간 여행>-<발톱>-<넌 바보다>-<입김>-<손을 기다리는 건>-<공 튀는 소리>-<반짝반짝>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별자리가 되었다.
너는
별이 되고 싶니?
너 혼자
반짝 빛나고 싶니?
너는
별자리가 되고 싶니?
여럿이 함께
반짝반짝 반짝반짝
빛나고 싶니?
-신형건 시 <반짝반짝>
이야기 #3: <넌 바보다>, 세상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되다
좋은 시들은 씨앗처럼 세상에 뿌려지고 별처럼 사람들 마음속에서 반짝인다. 그것이 바로, 시가 완성하는 마지막 이야기이다.
어느 날 ‘의사가 주인공이 아닌’ 병원 드라마에,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감성적인 타이틀의 TV드라마에, 순진한 사랑 고백처럼 한 편의 시가 흐른다. <넌 바보다>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의 시!
또 어느 날 <아는 형님>이라는 예능프로에 입시학원 일타강사가 출연해 시 한 편을 낭송한다. 그러곤 ‘시 공부’ 겸 ‘시 놀이’를 한번 해 보자고 제안한다. 단숨에 교실은 왁자지껄해지고, 모두모두 수다 대장에 놀기 대장인 <아는 형님>의 ‘커다란 아이들’은 각자 시 <넌 바보다>를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패러디하며 한바탕 시 놀이판을 벌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10여 년 간 연달아 실리며 모든 아이들이 읊조리던 시 <넌 바보다>는 이렇게, 세상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순수하고도 유쾌한 이야기가 되었다.
씹던 껌을 아무 데나 퉤, 뱉지 못하고
종이에 싸서 쓰레기통으로 달려가는
너는 참 바보다.
개구멍으로 쏙 빠져 나가면 금방일 것을
비잉 돌아 교문으로 다니는
너는 참 바보다.
얼굴에 검댕칠을 한 연탄장수 아저씨한테
쓸데없이 꾸벅, 인사하는
너는 참 바보다.
호랑이 선생님이 전근 가신다고
아무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혼자 찔끔거리는
너는 참 바보다.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바라보는
너는 참 바보다.
내가 아무리 거짓으로 허풍을 떨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끄덕여 주는
너는 참 바보다.
바보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고
씨익 웃어 버리고 마는 너는
정말 정말 바보다.
-그럼 난 뭐냐?
그런 네가 좋아서 그림자처럼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는?
-신형건 시 <넌 바보다>
또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함께 느끼는 경이로운 순간들
바로 그 시인, 신형건 시인이 40년간 써 온 시들 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 41편을 골라 모은 시집 <넌 바보다>가 출간되었다. 아침 햇살에 놀란 아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포착한 세상의 경이들이 시집 한가득 담겨 순수, 생기, 사랑의 빛깔로 반짝인다. 때때로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들’에게 주는 시들이다.
오래 전에 쓴 시들을 꺼내어 읽다 보면 새삼 새롭고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시들을 쓸 때에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 무언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보고 느낀 경이에 대해 혼잣말을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 말들은 시 속 화자의 목소리로 남아 누군가의 입에서 가만가만 읊조려지길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시를 써 온 지 40주년이 되고 보니 그동안 세상에 내보인 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와글와글하다. 그중 나름대로 또렷한 목소리들을 골라 시선집을 엮는다. 국어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시들을 비롯하여 웹이나 각종 미디어에 자주 인용된 시들을 위주로 골랐다.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시를 다시 골라 엮는 것은 앞으로 좀 더 많이 읽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아 있기에 나는 시를 계속 쓸 수 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는 즐거움은 때때로 내게 뜻밖의 경이감을 선물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그 경이로운 순간들을 누군가와 함께 느끼고 싶다.
-신형건, <시인의 말>
길고양이 릴리 아가씨
13,320얘, 내 옆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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